“Inspire Your Beauty!” “당신의 아름다움에 영감의 선물을 준다”28년 역사의 주어링은 대한민국 주얼리 산업의 역사와 함께 해온 주얼리 전문기업이다. 1992년 13평 작은 지하 공장에서 단 두 명의 직원으로 출발했던 주어링은 현재 업계의 대표 기업이 됐다. 주어링의 CEO 최점락 대표는 대한민국 주얼리 산업 성장사의 산증인이다. “너는 왜 그곳에서 일하니?” 막연한 꿈을 안고 상경한 17세 시골소년 “충남 보령,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 정말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님은 광산에서 일하셨고, 시골이었지만 집이 없어서 계속 이사를 다녀야 할 정도로 녹록하지 않은 가정환경이었죠. 농업고등학교를 지원했지만 농사로는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서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그저 “서울 가면 돈 번다”는 선배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친척집에 머물며 무작정 3~4개월 공사판에서 일을 했다. 그때 나이 고작 17세, 희망을 안고 서울에 올라왔지만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았다.“서울로 상경하며 나만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1억원을 벌자는 것이었죠. 누군가 돈을 벌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하더군요. 함께 있던 친구가 먼저 귀금속 세공을 하는 ‘와이(Y)체인사’에 입사했고, 저도 함께 취업을 하게 됐죠. 와이체인사 입사가 결과적으로는 인생을 바꾸는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1985년 입사한 와이체인사는 직원 30여명이 있는 귀금속 세공 전문 공장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 3만원을 받았다. 3년간 월급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았다.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시간이 없을 만큼 일은 고됐다. 성실하게 일했기에 3년차에 월급은 17만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목표했던 1억원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인생에 첫 번째 귀인을 만나게 된다.“1년 선배였던 형님인데, 제가 3년차 즈음에 입사를 했습니다. 그 형님의 질문 하나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제게 “너는 왜 여기서 일하느냐”고 묻더군요. “1억을 벌려고 일을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1억을 벌 것인가”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산술적으로 제가 당시 버는 월급으로는 50년을 일해야 꿈이 이뤄지더군요. 막연한 목표가 무거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난롯불 하나 켜고 두 사람은 밤새 ‘꿈’과 ‘목표’,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답을 찾아냈다. 그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회사의 사장이 롤 모델이 됐다. “반지를 만드는 하루 공임을 알기에 이를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토요일까지 일을 할 때니까 한 달에 26일을 일하면 하루치는 내 월급이고 25일치 공임은 결국 사장님이 모두 가져가는 구조더군요. 회사 사장의 입장에서 수익을 생각해보니 그제서야 환상적인 숫자가 내 앞에 보였습니다.” 13평 지하 공장에 뿌려진 꿈의 씨앗 공장을 직접 운영해야 하겠다는 확신이 섰다. 막연하던 1억원의 목표가 구체적인 꿈의 계획으로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바로 근무하던 회사 사장을 찾아갔다. 앞으로 3년 더 열심히 회사에서 일을 하겠으니 3년 후에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이야기했다.“워낙 힘든 일이었기에 직원들은 월급만 받고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직원 하나에게 최소한 3년간 더 근무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생각하셨겠죠(웃음).”구체적인 목표가 생겼기에 일에도 능률이 올랐다. 일은 여전히 고됐지만 2배로 더 열심히 했다. 그리고 약속했던 3년이 흘렀다.“사장님, 준비되었습니다!”출사표를 던지듯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6년간 착실히 모은 돈이 1,700만원 정도 되었다. 사장은 그런 그가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운 듯 이야기했다.“너, 그 돈으로 어떻게 공장을 하려고 하니?”그도 그럴 것이 최소한 공장을 하려면 보증금, 도구, 기계, 재료 등이 있어야 했다. 1,700만원은 어림없는 자본금이었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웃음). 사장님께 매달렸죠. 약속 지켜달라고, 사장님께서 밀어주셔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이죠.”1년간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사장이 손을 들었다. 마침 속을 썩이는 협력사가 있었다. 그 일감을 먼저 줘보기로 한 것이다. 결정이 나자 회사 인근에 13평짜리 지하 공장 자리를 덜컥 먼저 계약했다. 그의 추진력에 사장조차 혀를 내둘렀다. “1992년 6월 25일, 그날 근무를 마친 후 마지막 월급 받고 바로 저녁부터 공장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주어링이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주어링 설립 3년이 되던 시점, 드디어 그가 처음 꿈꿔왔던 목표 1억을 만들었다. 17세에 무작정 서울에 상경해 10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7년 동안 공장에서 일하며 2천만원을 벌었지만 1억을 만드는 데는 채 3년이 걸리지 않았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이미 오랜 기간 세공 현장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 든든한 내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업에 대한 열정과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자금 환경상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등 고가의 보석은 현실적으로 다루기 쉽지 않았다. 14K, 18K의 속칭 미스링이라고 하는 작은 반지 등의 아이템에 집중했다. 때마침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14K 전문점이 활성화되면서 오히려 위기가 큰 기회로 다가왔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회사가 급성장하는 계기는 사옥을 이전하면서 다시 한번 만들어졌다. 공장 확장 이전을 해야 할 시점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난 부동산 전문가가 건물을 구입하라고 조언을 해줬다. IMF로 인해 시장 평가액보다 훨씬 저렴하게 건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대출을 받아 처음으로 사옥을 마련했다. 불과 2년만에 더욱 사세가 확장되며 다시 이전을 해야 할 상황에서 사옥을 팔려고 보니 두 배 이상 올라 있었다. “목표를 차라리 1천억원으로 할걸 그랬나 싶더군요(웃음). 결국 성공은 노력과 운, 타이밍이 모두 맞아떨어질 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력과 운이 타이밍과 맞으려면 기회를 포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죠. 사업의 성장과정을 보면 기회를 과감히 잡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혜안을 갖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오랜 기간 덮었던 책을 다시 꺼내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과정을 이수하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지난 2006년에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공예문화정보디자인학과를 진학했다. 이후 경기대학교 보석마케팅 디자인학과의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보석마케팅 및 디자인경영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으며 만학도의 꿈을 이뤘다.현재 주어링은 주얼리 업계 그레이트(Great) 기업의 롤 모델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탄탄한 대한민국 주얼리 대표 기업으로 안착하고 있다. 대한민국 주얼리 사업, 글로벌을 꿈꾼다 이제 그의 목표는 좀 더 크고 넓은 곳을 향해 있다. 바로 한국 주얼리 산업의 세계화이다. 두 자녀를 모두 해외에서 공부하게 하고 다양한 국가에서 배우는 살아있는 삶의 경험과 교육을 중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유명 명품시계 회사의 제품에는 ‘메이드 인 제네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 패션브랜드에는 ‘메이드 인 파리’라고 되어있죠.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메이드 인 서울’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특히 K-POP을 필두로 K-FOOD 등 대한민국의 문화와 예술은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얼리 사업도 ‘메이드 인 서울’로서 세계적 명품의 가치를 인정받을 날이 곧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주얼리는 세계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세계화를 위해서는 작업환경의 선진화와 경영 시스템의 투명화 역시 필요하다. 다행히 과거 3D 업종으로 치부되던 귀금속 세공업 역시 다양한 국가적 지원과 기업의 개선 의지 덕분에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최점락 대표는 과거 자신의 꿈이 현실로 이뤄졌던 과정처럼 대한민국의 세공인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100년, 200년 이끌어 갈 수 있는 명품 산업, 명품 기업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보석’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 그는 오늘도 청년처럼 몰입하고 준비한다. 최점락의 감성 주얼리 최점락의 주어링 목걸이 최점락의 주어링 귀걸이